17년전. 복사단을 하게 되면서 제 신앙생활은 시작되었나봅니다. 물론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그 이후로는 성당에 있었던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거든요. 복사단에 처음 들어가게 되면서 수녀님도 만나고 신부님도 만났죠. 참.. 첫영성체를 하던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보니 기도문도 빨리외워서 수녀님께 칭찬을 받았었네요. 그렇게 해서 복사단에 들었었나봐요. 처음 복사복을 입고 제대에 올라가 첫 복사를 섰을 때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어땠어? 기분이 어때??" 물론 좋았었지요.
그렇게 새벽미사를 나가고 복사를 서다보면 저희를 보고 귀여워해주시는 할머니가 계셨었고 사순이나 대림때에는 복사들이 모두 모여 이리저리 바쁘게 무엇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전 너무 어린 초등학생이였습니다. 울기도 잘해서 제가 울고 있으면 주일학교 선생님이 자전거 뒤에 저를 태우고 동네를 한바퀴 돌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야고보 선생님이라 불렀었는데..
제가 어렸을때에는 사람이 많아서 교리도 두반으로 나누어서 했었습니다. 선생님도 많아서 한 학년이 두반으로 나누어졌어도 한반에 두분씩 선생님이 계셨어요. 토요일마다 미사가 있었는데 미사가 시작되기전이나 끝날때쯤에 율동을 하던게 기억에 납니다. '잘익은 수박하나 잘익었나 통통통! 단숨에 쪼개니 속이보이네~~' 수녀님께서 직접 율동도 가르쳐주셨었고 신약성서 목차를 노래로 가르쳐주셨었어요. '사도 로마 고린 갈리디아 에페소 필립보 골로사이 데살로니카 디모테오디오 ~~~ 요한 묵시~록'까지 아직도 부분부분 기억이 나네요.
또 여름이면 신앙학교를 했었고 은총시장을 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미사를 한번도 빠지지 않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그 때 신부님께서 은총표는 타면 은총표가 아니라고 태워보기도 하시고 복사 캐비넷 위에 숫자가 적힌 은총표가 놓여져 있었었죠. 그 은총표로 노아의 방주 만화책을 샀었는데 정말 지겹게 읽었습니다. ㅎㅎ 복사캠프도 자주 갔었는데 신부님 드린다고 다슬기를 잡기도 하고 저녁이면 낙서하는 형들때문에 긴장하며 잠이 들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형들과 약간의 문제가 생겨 복사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미사는 계속 나갔습니다. 헌데 교리를 빼먹고 오락실 가기를 좋아했었죠.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때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겨 그 이후에는 폐인같이 지냈지요. 고등학교때에는 점점 성당생활을 멀리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나고 나서 후회가 들더군요. 고등학교를 졸업할때쯤 고3피정을 가게 되었었는데 나도 모르게 교사를 한다고 했습니다. 지나고 보면 고등학교때 성당생활 열심히 하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잘 안나오던 애들이 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교사를 하고 캠프를 갔던것이 지구 연합 캠프였어요. 여행한번 혼자 다녀본적이 없던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간다니.. 정말 처음엔 엄청 겁을 먹었습니다. 여행계획을 세우기를 갈매못이란 곳에서 하룻밤, 합덕이란 곳에서 하룻밤, 한마음 수련장이란 곳에 모여 하룻밤을 보낼 예정이였습니다. 계획을 세우고 아이들과 만나고 장을 보는 것까지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것들이였습니다. 계획을 세우기 앞서 답사를 갔었는데 같은 본당 형이랑 여행지가 같은 선생님 두분이랑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두분중에 한분이 마리아누나였는데 이글을 보고 기억을 하실지 ㅎㅎ.
갈매못에서 하룻밤을 보낼때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이런저런 나눔을 하였습니다. 저녁노을부터 별이 뜨기까지 정말 아름다운 하늘이였습니다. 둘째날엔 버스 시간을 알아보지 못해 기차를 놓칠뻔하기도 하고 아픈 아이가 있어 약국을 헤메다가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또 한번 차를 놓쳐 아이들이 전부 나와 히치하이킹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목적지까지는 신기하게 도착해 있더군요. 그땐 그것이 다 도와주신거라고 혼자 굳게 믿었었죠. 둘째날 든든했던 부담임 샘을 서울로 떠나보내고 고생을 좀 많이 했습니다. 역시 신입은 신입이니까요. 부담임샘이 보여주셨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그 이후에도 제가 교사생활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혼자 밥먹는 친구를 챙겨주는 것. 귀가 잘 안들리는 친구를 위해 무언의 공공칠빵을 했었던 것. 걱정하고 있는 신입을 위해 격려의 말을 해주셨던것등등
어찌되었든 그렇게 첫 캠프가 끝나고 그 해 9월 저는 친구 바오로를 따라서 떼제동반을 하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랑 같이 중고등부 교사를 했었는데 저를 떼제에 초대했었지요.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 밥을 같이 먹고 노래하는 틈에 끼어 그렇게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제가 노래를 잘하는 줄 아는 심각한 병에 걸려있었습니다. 게다가 잘한다고 비행기태우는 몇몇의 착한 친구들 덕분에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그래도 그 덕분에 악기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거라도 없었으면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본당에서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한 고집하기 때문에 트러블도 많았었고 작은일도 크게 부풀려 생각하는 뛰어난 상상력 덕분에 바보같은 행동도 많이 했었습니다. 어찌보면 교사회가 저를 사람만들어준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정말 느낀것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다 적지는 못하지만 그일들이 제 삶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떠나야만 했습니다. 정든 사람들을 떠나기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속에 어둠이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마웠던 아이들과 선생님들에게 왜 더 잘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본당을 그리워했었습니다. 친구는 군대를 가고 혼자 외로웠습니다. 대학교 3학년 말부터 공부에 전념했고 졸업한 뒤 취직을 하면서 떼제마저도 그만두게 되었고 제 신앙은 일요일날 미사만 나가는 걸로 되어버렸습니다. 최우선 목표가 취직이였기 때문에 모든것을 멈추고 일만 했습니다. 그래도 신앙생활은 해야겠다라는 생각에 성가대에 들었다가 상처만 받고 나왔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친구가 제대를 했습니다. 그 때 저는 무모한 도전을 했습니다. 교사를 다시 시작했죠. 옛날처럼 멋지게 기쁘게 교사를 해보자 하고 시작했지만 옛날과 많이 다르더군요. 나이를 많이 먹었어요. 그리고 집도 멀어서 예전과 같은 그런 열정을 쏟질 못했죠.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은 점점 다가 오고 이별의 순간이 왔죠. 처음 제가 교사를 한다고 했었던 고3피정때의 그 곳에서 마지막 피정을 하게 될줄이야.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이들과 좋게 끝내지 못한것 같아 아쉬움도 많이 남았지만요.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직장생활 2년차 그리고 이젠 3년차. 사람들속에서 충격도 많이 받고 사회를 경험하면서 저는 점점 변해갔습니다. 예전의 열정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일만 죽어라 하는 직장인이 되어있었지요. 꼭 영화 후크에 나오는 피터팬이 어른이 된 기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행복한 생각을 하면 어디든지 마음대로 날아다니던 그 피터팬처럼 그 옛날로 돌아가보고 싶습니다.
감사하게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옛날 느꼈던 행복만큼 혹은 그 이상.. 그 선물이 제게 열매 맺게 하는 그날이 오길 기다립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다면 이곳에서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읽느라고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복받으세요~~
* 게시글 이동 알림 : 2008년 5월 20일 오진욱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