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앙의 시작을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묵주를 손에 드신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푸르스름한 새벽 천천히 언덕을 넘으며 새벽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가시는 모습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도 그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날은 밝아 있었고, 성당 주변에 있는 시장엔 아침 활기가 피어났습니다. 잘은 몰랐지만 이른 아침에 외가집 식구들의 손을 잡고 성당을 오가는 길을 생각할 때면 그냥 기분이 좋고 모든 게 따뜻해서 배가 간지러워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친할머니는 불교를 믿으셔서 성당 다니는 걸 싫어하셨기 때문에 그 기억은 계속되지 못했습니다. (지금 친할머니, 세례도 받으시고 매일 열심히 미사 나가십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15층 아이를 따라 다시 성당에 갔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어린 나도 춤추게 했나 봅니다. 어리숙한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어렸던 난 야무졌는데,(에잇 참, 누구에게나 그런 한때는 있지 않습니까)교리시간에 대답을 척척하고, 따박따박 기도문 외우면 선생님들이랑 수녀님들이 예뻐 죽겠다고 하셨습니다. 애들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놈의 잘한단 소리 좋아서 모든지 열심히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잘난 척 하면서 성당에 맛들였습니다. 다행히도 그때 하느님은 몇번 내 기도를 즉석에서 들어 주셨는데, (엘리베이터에 커다란 벌레랑 같이 탔을 때 날 안 물게 해주셨고, 엄마 아빠의 부부싸움을 거짓말처럼 멈추게도 해주셨죠.) 그럴 때면 "하느님, 진짜 계시는군요!"하면서 찬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세례를 받고 '마들렌 소피아 바라'라는 길고 긴 세례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인전을 읽은 이모가 유쾌한 어릿광대 같이 밝고 따뜻하고, 농담을 좋아하며, 편지를 아주 잘 쓰셨다는 그분의 모습에서 날 떠올렸다고, (혹은 제발 좀 닮으라고)강력 추천을 해 주셨거든요. 
중고등학교 때의 난 조숙하고 살짝 냉소적이기까지한 애였는데 (여러모로 옛날이 지금보단 낫네요.) 사람의 아들이랑 장미의 이름이랑 소피의 세계의 뒷부분에 실린 근대철학 부분을 읽고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혼자 고민에 휩싸였던 기억이 납니다. 스스로 지적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차가운 미소를 날린 주제에 성당에 나가서는 아주 열심히 학생회 활동을 했습니다.
얼떨결에 들어온 것 치곤 교사회에서도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활동에 치여 사람에 치여 영성에 쏟을 시간이 없었어,라고 징징거렸지만 제가 교사를 하며 양성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초급교사 학교 과정은 내가 목말라 하던 것들을 많이 채워주었습니다. 성서를 새로운 시선으로 읽고, 토론하고, 생각하다 보니까 예수님이 너무너무 멋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가 좋아졌습니다. 그 시대에 태어났으면 플랜카드에 '완소남 예수' 써붙이고 말씀 때마다 쫓아다닌 빠순이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예전엔 세례를 받을 때 "믿습니다!"라고 했으니까 믿어야 되는 거고, 기적도 많이 일으키고 했으니 위대하지 않은가하는 바보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세상의 눈과는 다른 그리스도의 사상이 작고 약하고 보잘것 없는 모든 것들을 품어주는 모습에 반했다고 할까요. 그 후로 교리의 방향도 많이 바뀌었고 청소년과 교사들과 함께하는 태도도 고쳐졌습니다. 선배 교사들 중에는 "소피아가 초급 듣고 오더니 이상하게 변했다."라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는 가슴이 아닌 머리가 믿는 신앙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학교도 졸업했고, 정들었던 동네에서 갑자기 이사도 갔고, 연애도 했다 깨지기도 하고, 취직해서 밤새 일도 하고, 이상하게 변해가는 회사에서 시련을 당하고 돈도 못 받아 보기도 하고, 몇 달 동안 친구들과 연락도 못해보며 가족과도 등지며 살아오고, 헉헉- 그렇게 어느 순간 난 너무나 갑자기 어른이 되었고 동시에 아주 많이 힘든 시기를 겪었습니다. 우울은 나랑 상관없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지속적이고 강력한 스트레스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도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몸은 말라갔고 피부는 퍼석해졌고 목소리엔 주눅이 들고 잘 웃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성당에서 미사를 볼때 성가대에서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를 불러주었는데 눈물 한 방울이 성서에 툭 떨어졌습니다. 분명히 누군가 괜찮다, 넌 여전히 소중해라고 말해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다니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다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모든 것이 제자리, 아니 더 좋은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혼자 가는 여행의 맛을 알아버린 후에는, 돈만 생기고 시간만 나면 짐을 쌌습니다. 스케치북에 드로잉을 채워 가면서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멋진 삶과 사고를 배웠습니다. 그 중 떼제에서의 기억은 기대하지 못했던 놀라움이었습니다. (떼제 얘기만 나오면 갑자기 격정적으로 변한답니다 ㅋ) 하느님이 맨발로 뛰어나와 '왜 이제 왔니'라고 반기시는 것처럼 날 안아주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사랑을 벗어나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이제 돌아왔습니다.라고 깊게 머리숙여 기도했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혼자 배낭을 메고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그곳에 앉아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과 우정을 나눈 것이, 내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하느님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음을, 그보다 더 전에 내가 겪은 아픔, 내가 성장하면서 만난 많은 것들이 지금의 나를 키우기 위한 햇살이고 거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의 평화와 사랑을 느끼기까지 아주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평화를 위해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언니는 꿈이 뭐예요?"라고 대뜸 물어댄 개신교 친구를 떼제에서 만났는데, 그 멋진 아이와 계획에 없었던 동행을 하면서 우리가 돌아가서 해야 할 일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는 나이는 어렸지만 생각의 깊이는 나보다 훨씬 깊어서 사실 난 주로 들었습니다. 그냥 들은 것도 아니고 중간 중간 '야, 잠깐만'하고서 그말을 막 받아적었습니다. -_-)내가 적은 그 애의 어록 중에 '십자수 이론'이란 게 있는데 (이 우스운 이름도 내가 붙인 겁니다.-_-) 세상은 하느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십자수 작품과 같다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색실을 가지고 있을 때 완성되는 작품. 이웃을 사랑한다고 모두 다 성직자가 될 수는 없듯이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고 싶다는 그 친구처럼 가난한 삶에 뛰어드는 위치에 껴진 색실도 있고, 나처럼 지긋지긋한 밥벌이의 굴레에서 벌어놓은 자본으로 그들에게 푼푼이 후원금을 보내는 위치의 색실도 있겠죠. 호호. 그 바른 위치를 찾고 각자의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 그게 혹시 사명일까요.
그때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난 나의 사명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전엔 몰랐는데 난 작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발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것에서 소중함을 느낄 줄 아는 게 나의 달란트는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확실히 마케팅의 달란트는 아니죠.) 사람들이 찾지 않는 작은 여행지, 작은 카페, 관객 몇 명 없는 작은 독립영화, 인권을 생각하는 작은 영화제, 인디밴드들의 작고 아름다운 음악, 편견 속에 작아지는 이주노동자들, 큰 미국과 이스라엘의 커다란 폭격 속에서 자라나는 중동의 작은 아이들, 사람들의 큰 이기심에 병들어가는 작은 지구, 그리고 큰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작아져야만 하는 오늘날 한국의 청소년들. 비주류의 사목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는 작은 공동체.
지금의 내가 관심을 갖고 애써 생각하고자 하는 것들은 참 작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함께 울어주는 것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바라보고 움직이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나의 사명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어느새 까먹게 될까봐 두렵기도 합니다. 안 까먹고 버티려고 여기서 부비적거리는지도 모릅니다. ^^

나의 마음이 무뎌지지 않게 하시고, 스스로 높아지지 않게 하소서.
하느님 작은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 또한 세상 모든 작은 것들을 소중히 섬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