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1일 나는 정말 뜻하지 않은 만남을 했다. 시간은 1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95년 시흥동 본당에서 청소년 담당 신부로 있을 때, 그곳 주일학교의 고등학생들은 4분5열로 갈라져 있었다. 나의 관심은 분열되어 있는 그 친구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고민을 하던 어느 날, 당시에는 없었던 학년별 MT를 가자고 그들에게 제안했다. 당연히 청소년 친구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분열되어 있던 청소년 친구들은 MT를 원하면서도 자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다른 친구들이 가면 가지 않겠다는 뜻을 비추었다. 고민 끝에 나는 각 그룹의 일명 짱이라 불리는 리더들을 조용히 사제관으로 불렀다. 그리고 "어렵게 만든 MT인데 너희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으로 그들에게 호소했다. 청소년 시기는 자기가 속한 그룹의 리더와 함께 움직이는 소속감이 강하기에 그룹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청소년 친구들은 그들의 리더인 짱에 의해 당연히 "딸려왔다"

마침내 40여명의 친구들이 함께 법원리 본당의 갈곡리 공소로 출발했다. 보통 고등학생의 미사 참석인원이 30명이었는데, 짱의 말 때문에 냉담하던 친구들까지도 다 왔던 것이다. 짱들의 위력은 역시 대단했다. 하지만 버스에서부터 그들은 당연히 끼리끼리였다. 서로 말도 나누지 않았다. 도착 후 나는 카드놀이로 조를 나누었다. 각 분파의 친구들이 서로 섞여지게 하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서로 한 조가 된 아이들은 큰 상금이 걸린 게임에 몰입했다. 조별로 대항하게 된 축구시합, 오재미 놀이는 그들에게 서로 말을 주고받게 했고, 조별 식사는 생존을 위해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했다.
식사 후 조별로 진행된 장기 자랑에서 우리는 함께 웃고, 함께 노래했다.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장기 자랑이 끝나고 짧은 떼제기도를 한 뒤, 촛불을 몇 개 둔 아름다운 분위기에서 나는 청소년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우리가 친구인데 오래 동안 서로 미워하고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서로 함께 같이 지내보니까 우리 모두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동안 친구들에게 받은 상처나 바람을 조별로 나눠보자." 조별 나눔은 시작되었고, 몇 몇 친구들이 그동안 아팠던 것을 진솔하게 나누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들은 울면서 자신의 내면을 다른 친구들에게 표현했는데, 모두의 마음이 움직여 모든 아이들이 울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꺼내놓으며 함께 하나가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마무리로 떼제기도를 할 때는 성령께서 그 어떤 때보다 감동적인 모습으로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 새벽까지 우리는 갈곡리 공소의 어둔 밤을 노래하면서 거닐었던 기억이 있다.

 

 

그 다음날 가까운 한 수도원으로 걸어서 미사를 드리러 갔다. 나는 맨 앞에서 고백성사를 주면서 걸었는데, 아름다운 논길을 걸으면서 거의 모든 친구들이 고백성사를 드리러 앞자리로 앞자리로 걸어 나왔다. 수도원에서의 미사 후에 한 친구가 이야기했다. "신부님, 저희 10년 후 오늘 신부님이 어디 계시든지 찾아 가겠습니다" 그 친구는 아마도 거룩한 변모 때의 베드로처럼 자신들의 그 변화에 대해서 기억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루가 9장 33절 참조)

그리고 몇 개월 후 나는 교구의 청소년 사목 책임자로 이동했고, 그들의 약속은 내 마음 속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10년이 지난 2005년 10월 1일 나는 마닐라에서 머물면서 공부하고 있었고, 물론 그들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모든 청소년 시기가 그렇듯이 청소년의 약속은 때로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날 저녁 미사 때 홀로 그들을 기억했다. 그런데 10월 마지막 주간 나는 메일 한통을 받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신부님 기억하시나요? 11월 11일 빼빼로 데이에 저희가 찾아가겠다던 말을 말입니다. 저희는 매년 만날 때 마다 이제 3년, 2년 남았다고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아뿔싸! 내가 날짜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1월 11일 빼빼로데이에 학교문제로 잠시 국내에 머물던 나에게 그들은 빼빼로를 들고 찾아왔고, 우리는 함께 미사를 드렸다. 이미 그들의 1/3이 결혼을 했고, 아이들도 데리고 왔다. 나는 그 아이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 철없던 친구들이 벌써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다니!' 나는 다시 깨달았다. 청소년 사목은 바로 열매를 맺지 못하지만, 마음을 다해 씨를 뿌리면, 10년 혹은 20년이 지난 다음에야 그들의 삶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평화신문 2006.1.8일자 '조재연신부의 청소년사목이야기'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