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4-22 20:47
꿈의 씨앗 7 - 청소년을 택한 이유
 글쓴이 : 조재연
조회 : 3,816  
 
 
◇ 청소년을 선택한 이유 ------------------------------


2004년 11월 27일. 모두가 잠든 마닐라의 새벽에 잠을 청하다, 청하다 책상에 앉았다. ‘내가 왜 여기에 와서, 40대 중반의 나이에 이러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본질적인 질문이 내 가슴을 꽂았다.

나는 왜 청소년 사목에로 불리웠는가?

이것은 오랫동안 내게 끊임없이 계속 되는 질문이었다. 왜 하필이면 청소년인가?
노동자, 어린이, 노인, 장애자, 거리의 사람들, 고통 받는 많은 부류의 사람들… 그 가운데 왜 하필 청소년 사목에로 불리웠는가? 대체로 어떤 하나의 성소, 부르심에는 다 자신의 이력을 토대로 불리우는 것 같다. 고기잡던 어부들이 사람 낚는 어부로, 유대교의 신봉자였던 사울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불리워졌듯이 말이다.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여겨진다.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참 사랑을 많이 받았다. 누나들과 형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했고, 모든 형제들에게 엄하시던 아버지는 내게는 예외이셨다. 할머니의 쌈지돈은 내 용돈 창고였고, 어머니의 사랑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내게 가장 큰 사랑을 주신 분은 역시 어머니였다.
 
 
 
내가 6살쯤이 되었을때, 나는 신장염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다. 1년을 매일 흰죽과 병원 간장만을 먹곤 했다. 조금만 다른 음식을 먹으면 체하고, 바짝 바짝 말라갔다(그때의 영향으로 지금도 남들에 비해 훌쩍한 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밥이 먹고 싶어서 밥을 먹었다가 식중독에 걸렸고,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져서 병원에 실려 갔다. 그리고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잘못 하면 내가 죽을 거라는 말이었다. 어린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엄마와 떨어져야 한다는 두려움에 무서웠다. 그래서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거야?"
어머니는 "응, 네가 죽으면, 부엌 찬장 옆에 유리 상자를 만들어서 밥할 때 보고, 설거지 할 때 보고 엄마 곁에 둘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나는 엄마의 그 말씀을 들은 후, 내가 죽어도 엄마가 나와 함께 있을 거라는 깊은 신뢰감을 얻었고, 그 신뢰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사제가 되어 백혈병을 앓고 있는 어린 아들을 둔 어머니를 병원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그 어머니는 아들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가슴을 칼로 찌르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 때 나는 내 어린시절 어머니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그러나 병든 아들의 그 아픈 질문에도 어린 아들을 안심시키는 어머니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이런 사랑을 먹고 자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된다. 집안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매우 힘든 시기였다. 형제들이 당시의 월사금(등록금)을 못 내고, 수업시간에 교실 밖에 손을 들고 있어야했다. 그때 우린 지금의 건국대학교 후문 가까이의 자양동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많은 식구들을 부양하시기 위해, 건국대학교 뒷산에 있는 텃밭에서 채소를 떼다가 리어커에 싣고 파셨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나에게 부탁을 하셨다.
"재연아, 뒷산의 언덕이 너무 가파르니 리어커를 좀 밀어다오."
난 정말 싫었지만, 엄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서 리어커를 밀고 동네로 들어섰다. 난 그런 내 모습을 행여 친구들이 볼까봐, 리어커를 뒤에서 밀면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리어커의 모서리에 머리를 거의 쳐박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연아, 부끄럽고 창피하니? 엄마는 하나도 안 부끄럽다.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들이 그래도 밥을 먹을 수 있잖니!"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전에는 사장부인이라고 불리던 어머니셨는데, 어머니는 우리 가족들을 위해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버리고 그런 일을 하셨던 것이다. 나는 그날 엄마에게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엄마가 한없이 안 되어 보여서 어린 마음에 많은 눈물을 뿌렸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기억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5월 5일은 어린이 날로 늘 운동회가 있었다. 그때의 집안 형편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칠성사이다, 삶은 계란, 김밥을 싸서 부모님과 같이 운동회에 가는 분위기이지만, 난 엄마에게 말도 못 꺼내고 형이 입던, 조금 색이 바라고 몇 군데를 수선한 하얀 체육복을 입고 학교를 가려던 참이었다. 조금 우울한 기분으로 대문을 막 나서는데 어머니가 조용히 따라 나오셨다. 형과 누나 몰래 대문밖에 따라 나오신 어머니는 어린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손에다 5원을 쥐어주셨다(오늘 날 한 5천원-만원 정도의 돈일 것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재연아, 미안하다. 어린이 날인데 김밥도 못 싸주고, 이것 밖에 못 주는구나, 하지만 맛있는 것 사먹고 재미있게 놀다 와라." 어머니를 뒤로 하고 난 손에 5원을 쥐고 뛰어가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날 내가 무엇을 사먹었는지 기억이 없다. 하지만 난 지금도 어쩌다 5원짜리 동전을 보면, 그때 대문 밖에서 손에 쥐어주시던 어머니의 손길을 기억하곤 한다.

어머니는 6학년이 되던 해, 유방암에 걸리셨다. 그리고 수술로 한쪽 가슴을 절단하실 수 밖에 없었다. 난 그것이 어머니에게 얼마나 힘드셨는지 커서야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학교를 갔다 오면 어머니는 평소에 즐기지 않으시던 화투를 치자고 하셨다. 지금 되돌아보면, 수술로 인한 고통과 당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으시려고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머니는 수술을 받으신 후 4개월을 더 사셨고, 돌아가시기 며칠 전 화투를 치시다가 문득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형들과 누나들에게 의지하지 마라. 네 혼자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형들과 누나들이 잘 되어도 네가 잘 되어야 한다."
나는 엄마가 왜 어린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몰랐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니는 하느님께로 가셨다.

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고, 형제들이 있어도 어머니의 사랑을 대신 해 줄 수는 없었다. 2년 반 후 아버지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이 시간을 돌이켜보면 난 시커먼 터널을 지나온 것 같다. 색깔로 치면 뿌연 회색빛이다. 삶에 자신이 없었다. 사춘기와 겹쳐서 마음 안에 알지 못할 공허감과 분노, 그리고 부모가 없다는 박탈감, 지하 전세방에서 그 침침함의 시간들, 친구들과의 관계도 힘이 없었다. 늘 우울함과 열등감에 시달렸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보냈는지…. 그때 내가 즐겨 입에 흥얼거리던 노래는 내 삶의 우울함을 상징한다.
"꽃잎 끝에 달려있는 작은 이슬방울들, 빗줄기 이들을 찾아와서… 음 어디로 데려갈까…
바람아 너는 알고 있나 비야 네가 알고 있나, 무엇이 이 숲 속에서 음 이들을 데려갈까…"

나의 유일한 해방구는 성당이었다. 난 학교에서는 힘없고, 자신감 없는 아이였지만, 성당은 내게 힘을 주었다. 내 가정의 상황을 묻지 않았고, 우리의 경제적 능력을 문제 삼지 않았다. 성당 친구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줬다. 신부님, 수녀님은 늘 수용적이셨다. 파란 눈의 아일랜드 사람 민 후고 신부님, 그 분은 시간이 나시면 우리를 남한강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때의 즐거움은 사춘기의 손에 꼽는 몇 안되는 기쁨 중에 하나였다.
나는 많은 시간을 성당에서 보냈다. 평일미사를 거르지 않고 다녔다. 눈 쌓인 새벽길을 하얀 입김을 뿜으며 가던 화양동 성당 가는 길, 여름날 신선한 새벽공기를 맡으며 뛰어가던 그 길… 그 시간들은 내게 한없는 쉼과 충전의 시간이었다.
나의 우울함과 사춘기의 갈등은 성체조배를 하며, 주님께 눈물을 흘리던 것으로 지나갔다. 얼마나 많이 성당에 혼자 앉아 있었는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본당 신부님이 당신 어머니의 장례를 하고 오셔서, ‘이제야 성모님을 어머니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시면서 성모님이 바로 당신 어머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했다. 그리고 나도 성모송을 외우면서 내 어머니께 기도했다. 어쩌면 그 수많은 묵주기도들 가운데 내 사춘기는 통과했는지 모르겠다. 바로 내 어머니의 그 사랑의 기억과 함께….

난 사제가 되었고,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청소년 사목에로 초대하셨다. 난 한 아이가 홀로 있으면, 그것을 견디지 못해 했다. 어떻게든 말을 걸고, 무엇인가로 초대했다. 한 아이가 내뱉는 한 마디 말에서 그의 배경을 생각하게 됐고, 어떤 친구의 고민 한 마디에 내 마음은 온통 그 아이 생각뿐이었다.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그냥 내 마음이 혼자 있거나, 말이 없거나, 무언가 문제를 담은 아이에게로 시선을 향하게 했고, 본능적으로 내 마음이 그 곳에 머물렀다.

난 그 아이들의 우울함에 내 사춘기의 우울함을, 그 아이들의 고독함에 내 사춘기의 고독을, 그들의 공허감에 내 사춘기의 공허감을 읽으며, 지독하게 외로운 사춘기를 보냈던 내 모습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면 그들의 숨겨진 마음을 읽는데 남들보다 빨랐는지도 모르겠다. 난 어쨌든 청소년 친구들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까 궁리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청소년에 대한 지식도, 그들에게 매력적인 것도, 그들을 도울 방법도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을 향한 마음이었다.
나에게는 그들을 위해 나를 바치고 싶은 마음, 그들을 돕고 구원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열정에 가득 찬 마음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내 인생 초기의 13년 동안 넘치도록, 그래서 더 이상 담을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받은 내 어머니에게서 배운 그 분의 마음이었다. 아니 하느님께서 내 어머니를 통해서 나에게 가르쳐주신 마음이었다.

생각만 해도 내 가슴을 울리는 그 사랑의 순간들안에 그분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유리 상자, 리어커 뒷 모서리, 5원, 화투… 나에게 이것들은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하느님의 마음이며, 나에게는 하나의 성사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랑을, 바로 내 어머니가 내게 담아 주셨던 그 하느님의 마음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난 지금도 버스를 타고 가다, 전철을 타고 가다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청소년 친구들 만나면 , '저 친구는 무엇을 힘들어할까?' 하고 본성적으로 마음이 기울어진다.

이러한 나의 삶의 어둠과 아픔을 통해서, 그리고 어머니의 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청소년 세대를 구원하라고 내 마음에 불을 지피시는 것이다.

 

 
 
난 생각한다.
"하느님께서 내 부모님을 남들보다 일찍 데려가신 것이 나에게 부정적인 사건이었나?"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나는 확실한 대답을 얻게 된다.
그 사건이 내게 부정적이었든, 긍정적이었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무엇에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간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민을 통해서 새로운 일을 하시는 하느님을
나는 청소년 친구들과 함께 찬미 할 것이다.


 
 
- 2005년 2월 28일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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