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4-22 23:20
꿈의 씨앗 39 - 아! 블라디미르의 성모님
 글쓴이 : 조재연
조회 : 6,676  
 
 
이 글은 2004년 11월 마닐라의 동아시아 사목 연구소(EAPI)에 머물면서 1996년부터 2004년까지 사목했던 서울대교구 본당 중고등학생 사목부를 떠날 즈음을 기억해내면서 쓴 글이다.


2004년 3월

지난 1월부터 360명의 교사들이 일주일간의 이론과정과 시험, 2박 3일의 연수가 포함된 초급 교사학교를 통해 성령의 불길을 갖고 자신의 본당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청소년 사목의 기초에서부터 성서필사, 주님맛들이기, WWJD등을 배우고 익힌다. 마치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듯 복음의 씨앗을 청소년의 가슴이라는 밭에 뿌리는 것.과 같은 시간이다. 그들의 그 함성과 표정은 함께 한 모두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파견미사는 그야말로 전례의 정점이었다. 그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과 성찬례의 거룩함...
이번 신입교사 학교에는 올해 교사를 시작하는 친구들 513명이 참여했다. 매년마다 숫자가 늘어났다. 신입교사 학교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세 가지 그리스도인 상 가운데 군인의 모델을 가르치고 있었다. 지난 몇 년의 체험을 통해 의도적으로 500여명의 많은 교사들을 한 군데 모아놓고 사명감과 소속감, 투철함 그리고 교사로서의 기초 양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신입교사학교 2박 3일을 다녀오면, 참여하지 않은 교사보다 6개월을 정도 빨리 적응한다는 것이 본당 경력 교사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이다. 그리고 “교사생활 오래하자 5년 이상! 5년 이상!”이란 구호를 만들어 좀 더 오래 교회에 투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신입교사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또 파견미사를 드리면서 참 슬펐다. 신입교사학교를 약 9년간 했지만, 이번이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과 내년에는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스러움 등 만감이 교차했다. 사실 현실에 직면한 상황을 머릿속으로는 순명하고 있지만 마음 안에는 슬픔과 쓰라림이 내재해 있다.

나의 가장 큰 슬픔은 교회가 나에게 부여해 준 축적된 청소년 사목의 체험이 단절된다는 것이다. 교구의 책임자로 재임하면서 깨달은 것이 다음 책임자와의 연계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사이동을 하게 될 때는 후임이 될 신부를 미리 정하여 적어도 6개월 정도는 보좌신부로 함께 하면서 사람과 프로그램을 인수인계하는 전통을 세우려고 여러 신부들과 함께 수년 동안 많은 노력을 해왔다. 어떤 일이든 만드는 데 10년이 걸린다면 무너지는데 6개월도 안 걸린다는데... 아직 어린 나무인 CYA(가톨릭 청소년 연합회),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새로운 실험인 작은 공동체, 청소년 중심의 청소년 사목, 양성시스템 등이 내가 떠나면 그동안의 교회가 겪어왔듯이 80-90%는 무너질 것이라고 주변에서 이야기하고는 한다. 그럴 때 더욱 가슴이 아프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야겠지만, 나에게 있는 부성(아버지의 마음)은 어린 친구들을 볼 때 슬픔이 가득하다.

인사이동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 잘 먹지도 잠을 잘 자지도 못했다. 마음 안에 슬픔이 가득했다. 한 사제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교회의 비전 - 청소년이 주체가 되는 교회, 참여하는 교회의 상 - 을 살아왔는데... 너무도 큰 슬픔 앞에 나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2004년 5월

그러던 5월 어느 날 밤 나는 새벽녘에 또 잠이 깼다. 내 방 머리맡에 있는 '블라디미르의 성모님'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내 시선은 이내 그 이콘에 머물고 말았다. 15년간 내 방에 모시고 있는 이콘이었는데 새삼스럽게 다가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삶의 방향에로 내게 주어진 그 시간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마리아의 그윽한 눈길을 바라본다. 하느님의 그 자비로우심이 담긴 그 눈길, 자비로우신 어머니. 마리아는 교회를 상징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모(자비로운 어머니)이신 교회라고 표현한다. 아기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교회)를 왼팔로 꼭 붙잡고 계신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선은 바로 위를, 하느님 아버지를 향하고 계신다.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시는 예수... 아기 예수님의 목은 성령의 목소리라고 한다. 마리아는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안고 계시고, 왼손으로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계신다. 즉, 교회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이콘을 다시 바라보면서 어머니이신 교회를 바라보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나에게 어머니이신 교회를 끌어안으라는 초대를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당신처럼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면서 성령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말이다. 이 이콘을 바라보면서 나는 더 깊이 기도하게 되었고, 어머니이신 교회를 생각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국어 책에 최남선 시인의 글이 있었다. 김군은 초상화가에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을 들고 가서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김군의 어머니는 한쪽 눈이 없는 애꾸눈이었다. 김군은 화가에게 어머니의 눈을 성하게 그려달라고... 그 이야기를 들은 최남선 시인이 김군을 꾸짖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대의 어머니가 그 한쪽 눈이 없는 눈으로 어렵게 그대를 애지중지하며 키워왔는데, 어떻게 그대의 어머니를 부끄러워한단 말인가? 그대의 어머니가 설사 문둥병자라도 그대의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 바꿀 수 없다." 블라디미르의 성모 이콘은 나에게 최남선 시인의 글을 떠오르게 했고, 바로 어머니인 교회에 대한 생각과 연결되었다. 나를 키워주고, 성장시킨 어머니인 교회... 비록 내게 슬픔을 주지만, 난 내 어머니인 교회에 대한 성실을 다 해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쳐 오름을 느끼고 있었다.


2004년 7월-8월

슬픈 마음을 다 잡고자 인사이동 전에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프랑스 리모네의 프라도 신학교에서 2주간 연수가 있었기에 먼저 떼제 공동체를 방문했다. 떼제에서 많은 젊은 친구들과 함께 열흘가량 머무르며 기도를 했다. 이 일련의 여정을 통해서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지나간 몇 개월간의 시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떼제에서의 어느 날 저녁 기도 가운데 마르코 복음 1장의 말씀이 들려왔다. "Then the Spirit drove him into desert"(Mk 1, 12) 마르코 복음의 이 말씀은 이전에 알고 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때가 되어 광야로 스스로 나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내몰았다는 의미가 확실히 다가왔다. "성령께서 예수를 광야로 내몰았다..." 이 말씀이 순간 내 마음에 불꽃처럼 다가 왔다. 그러면서 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고독과 유혹의 땅으로 몰았는지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와!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양성 방식이구나!" 하는 탄성이 내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을 통해서 사탄과 들짐승이 우글거리는 거친 광야로 내 보내셨다. 이는 애지중지 하는 아들을 품안의 자식으로 감싸서 유약하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상황으로 내쳐서 혹독한 과정을 통해서 성장시켜 하느님 나라 도래를 선포하게 하는 일꾼이 되게 하시려는 계획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삶의 여정이 나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하느님께서는 나를, 청소년 사목을 저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파견하시기 위해서 시간을 주시는구나. 그래서 이렇게 힘들지만 이 일련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시는구나" 하고 말이다. 그래서 안정을 추구하고 떠남을 두려워하는 나를 인사이동에 의해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미래로 내 보내셨다고, 아니 내 몰으셨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평화가 찾아왔다.

처음에는 내 자신의 슬픔에만 몰두되어 모든 것이 짐처럼 느껴졌고, 모두를 내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15년의 청소년 사목 경험은 개인의 경험이 아닌 교회가 나에게 부여한 교회의 체험이라는 것을 깨닫고, 청소년 사목에 대한 공부를 계속 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복자 슈브리에 신부의 글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한 신학생이 박사과정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복자 슈브리에 신부에게 물었을 때 그 대답은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학위를 하지 말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하라"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청소년을 그리스도께 초대하기 위해서 더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청소년들에게도 경험있는 사목자가 필요하고, 그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려는 사람이 필요하고, 전문성을 갖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옹호해 줄 누군가 필요하다. 그 누군가가 바로 나 자신이라고 확신했다.


2004년 10월 - 2008년

나는 교회를 위한 새로운 계획을 꿈꾸게 되었다. 지난 4년간 필리핀 교회의 청소년 사목연구를 위해 1년 반을, 미국 교회의 청소년 사목을 리서치하기 위해 1년을 보내며 의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와 교회와 청소년을 위한 새로운 꿈을 이루기 위해 하나씩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이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사명이 좀 더 선명해 지는 것을 깨닫는다. 마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찌꺼기들이 떨어져나가고 정화되는 것처럼 나에게도 저의 청소년 복음화에 대한 부르심, 사명이 하나의 직책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하나의 성소라는 것을 말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표현처럼 “거룩한 창녀인 교회”, 문둥병자와 같은 어머니인 교회이지만, 청소년 사목에 나 자신을 던짐으로 내 어머니를 사랑하라는 그 부르심으로 초대받고 있다.

지금, 나는 청소년 사목자의 시선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
"한국 가톨릭 교회의 청소년 사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이 무엇인가?"
오늘도 나의 공부와 기도 속에, 생활과 산책 속에 나는 이 화두를 끌어안고 씨름하고 있다.


** 이 글은 미래사목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월간 사목정보 2008년 10월호(통권10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2009년 2월 24일 게시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